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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테의 강

기찻길옆 2013. 7. 21. 07:01

레테의 강.

 

한 여인이 스틱스 강가로 내려왔습니다. 그 여인을 위해, 안개가 짙은 강물을 헤치며 한 사나이가 배를 저어 왔습니다. 그는 사자 '챠론'으로 그의 임무는 여인을 배에 태우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 입니다.

 

여인의 얼굴은 침착 했습니다. 챠론이 손을 잡아끌어 여인을 배에 태웠습니다. 그리고는 여인에게 물이 가득 들어있는 물병을 건네주었습니다.

 

  "여인이여, 만일 그대가 이 안의 물을 마시면, 당신은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고통과 아픈 일들을 다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이 물을 꼭 마시라고는 권하지 않습니다. 다만, 강을 다 건널 때 까지 이 물을 마실지 아닐지는 결정해야 합니다."

여인은 챠론의 말에 귀가 솔깃해 졌습니다.

 

  "정말 인가요? 진짜 이 물을 마시면 슬프고 아픈 고통스러운 일들이 다 사라져 버리는 가요? 전 그 지긋 지긋한 기억 들을 다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여인은 그 물을 마시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챠론은 다시 말을 하였습니다.

 

  "여인이여. 허나, 당신이,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그리고 괴로운 기억들을 잊어버리려 한다면, 동시에, 성공했고 즐겁고, 또 행복했던, 아름다운 기억들도 다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명심 하십시오. 당신이 상처 받은 것을 잊고 싶다면 동시에 당신이 사랑 받았던 모든 것들도 다 잊혀 진다는 것을."

 

그 말을 들은 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더니 조용히 챠론에게 물병을 다시 건네주었습니다. 챠론은 서서히 노를 저어 갔습니다. 그 여인의 고통 받고 상처받고 힘들었던, 그리고 행복했고 사랑 받고 아름다웠던 모든 기억들을 배에 함께 태운 채 레테의 강을 건너갔습니다.

 

2006년 11월 17일.

 

동아대 병원 중환자실에는 내 큰누나가 두 달째 입원해 있다. 소생 불가능한 상태에서 의식을 잃은 채 기계에 의해서만 생명이 연장되고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생을 다 한다는 부름에 가족들 모두 모이길 수차례, 이젠 진짜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건만, 병실을 찾는 사람들이 너무 뜸 하다.

 

수요일. 오전 중 일이 끝나 부리나케 부산 동아대 병원으로 향했다. 매형에게도 연락 안 드리고. 중환자실은 오후 1시 50분부터 2시10분까지 20분간 1인 만 면회가 가능하다. 3층으로 걸어가며 그때에야 전화를 하니 매형은 벌써 중환자실 앞에 와 있다. 자리에 앉아있다 벌떡 일어나며 반갑게 맞이하는 매형은 등 뒤로 무엇인가 감추었다.

 

  "아무도 안 와. 의식은 없어도 누나는 네가 온 걸 알거야."

  "그 뒤로 감춘 건 뭐에요."

도대체 무엇이기에 내게 감추려는 것일까, 인사보다 더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이거 말이냐?"

갑자기 매형의 얼굴이 붉어 졌다.

 

 “네 누나, 원래 예쁜 얼굴 아니니. 더운 물수건으로 얼굴 좀 닦고 화장 좀 해 주려고."

작은 물통에 담긴 더운물과 수건, 그리고 크림과 입술연지까지. 괜히 물었다 싶음과 동시에 왈칵 울음이 목 젓까지 올라왔다.

 

방역가운과 신발을 갈아 신고 누나에게 갔다.

  "큰누나, 나야 진주 식이가 왔어요."

 

가죽만 남은 핏기 없이 차가운 손, 아무리 비벼대도 큰 누나는 알지 못한다. 기어이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나는 한바탕 눈물샘을 터트렸다.

 

큰누나는 내겐 또 다른 어머니였다. 아버지일로 집안일을 돌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초등학교 입학식 날 내 손을 잡고 갔고. 소풍날도 운동회 날도 그렇게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때 나는 그림을 잘 그렸다. 제법 큰 상을 받아온 날, 큰누나는 나보다 더 신이 나서 나를 등에 업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었다. 여기엔 차마 못 쓰는 크나큰 사연을 안고 살면서도, 동생들이 걱정되어 끝까지 친정 곁에 머물렀던 큰 누나. 그 큰누나가 이제 생의 끈을 놓으려 하고 있다.

 

  "모셔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이거 차비하시고 밥 사 잡수셔요."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봉투에 담아 매형의 손에 쥐어 드렸다. 

 

 "아니야. 돈은 네가 더 필요하잖아,"

매형은 한사코 받지 않으려 했다. 

 

 "받으세요. 전에는 매형이 우리 밥을 사주셨지만 이젠 우리가 사 드릴 차례입니다. 받으세요, 그래야 제 마음도 편합니다." 

 "그러마. 고맙다. 네 누나도 고마워 할 거야. 어여가라 먼저 간다."

 

얼른 돌아서 가는 매형의 두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숨을 죽이며 울고 가는 매형의 뒷모습이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이젠 우리들께의 사람들이 자리를 떠난다. 있을 땐 몰라도 빈자리는 커 보이는 법이다. 건강은 건강 할 때 지켜야 한다지만, 그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될까?

 

2007년 2월 2일

 

해월정. 언제였던가! 4년 전으로 기억되는 어느 봄날 나는 이곳을 찾았었다. 그때는 바다와 하늘이 모두 한 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넓게 펼쳐진 바다 끝쯤에 하얀 띠만 뭉실 두른 채로.

 

 “바다와 하늘을 구별하기 위한 신의 작품이죠.”

동행의 말에 연방 감탄사를 내 뿜던, 맑은 날이면 대마도도 보인다던 그 해월정을 나는 다시 찾았다. 오늘은 그 때완 달리 바다는 너무도 파란 짙은 색채 속에 누워 있고, 그보다 더 엷은 파란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위로 이어져 있다. 여름이면 구름처럼 모여 들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외로움마저 떠나간 해월정은 갈기를 곧추세우고 청사포 해안을 달려드는 하얀 파도만 바라보고 있다.

 

언제고 다시 오고픈 해월정 이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올수 있는 자리이건만. 큰누님과 나는 한 번도 이 자리에 같이 서질 않았다. 늘 푸른 동해바다가 그리워 아픔 속에서도 하늘만 바라보던 내 큰누님은 그토록 보고 싶던 바다를 보지 못하고 오늘로서 49재를 지내며 이승의 한을 떨쳐버리고 하늘로 돌아갔다.

 

바다는 말이 없고, 올곧은 나무처럼 자라라며 언제나 큰 산이 되어 나를 위해주던 내 큰누님도 영원히 말이 없을 것이다. 나는 큰누님에게 받기만 했지 살며 아무것도 준 것이 없다. 차마 글로선 쓸 수 없는 친정집 식구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져버린 불쌍한 내 큰누님의 마지막 마음만, 해월정 언저리에 뿌려놓고 퉁퉁 부은 눈망울로 돌아보며 또 돌아보며, 어둠이 시작되어서야 나는, 해월정이 있는 달맞이 고개를 내려왔다.

 

 2007년 7월1일 

 

봉숭아 채송화 그리고 과 꽃등, 작은누나는 옥상 한 귀퉁이에 흙을 붓고 꽃밭을 만들어 우리 토종 꽃들을 많이 심고 가꾸었다. 5층 옥상 방 작은누나네 집은 방문만 열면 이 꽃들이 눈에 들어 마치 시골집 온 것처럼 좋은 기분이 든다.

 

누나, 작은누나는 돌아가신 큰누나완 달리 동화처럼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해마다 봄철이면 과꽃을 작은 화분에 담아 동생들에게 선물도 하며 항상 아기자기하게 산다.

 

강원도 살 때, 시집 간 작은누나가 첫 친정나들일 했다. 전깃불도 없는 당시의 우리 동네 최대 오락거리인 유일한 라디오 한 대가 우리 집에 있었다. 큰누나가 거금의 돈을 들여 사서 보내온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저녁 8시면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려 우리 집 마당으로 구름처럼 모여들곤 했다. 기억해 보면, 파도소리, 님 따라 구름 따라, 저 눈밭에 사슴이, 아빠 품에, 길 잃은 사슴 등, 마을사람들은 소일거리로 감자바구니를 들고 와, 라디오보다 더 큰 배터리를 등에 진 우리집 트랜지스터에 귀를 모으며 연속극을 들었다.

 

어머니는 이들을 위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낮에 베어둔 쑥부쟁이로 모깃불을 피웠다. 그리곤 찐 감자와 옥수수 등을 내 오기도 하였다. 강원도는 키가 큰 호밀을 많이 재배한다. 귀리라고도 하는 호밀은 시커멓고 투박하고 참밀만큼은 맛도 없다. 그 호밀을 벗길 때 나오는 밀기울은 보통 가축들의 사료로 사용한다.

 

하지만 먹을 것이 귀하던 그 시절엔 훌륭한 간식으로도 활용되었다. 어머니는 당원을 넣고 이 밀기울로 떡을 만들어 감자위에 넣고 쪄서 자주 내어왔다. 작은누나는 이때 먹은 밀개떡의 맛을 못 잊어 시집으로 돌아가자 당장 밀개떡을 만들었다. 시내에선 밀기울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터인데, 하여튼 그렇게 해서 만든 밀개떡을 뭐 그리 귀한 것이라고 작은누나는 시집식구들과 이웃들에게도 쫙, 돌렸다.

 

그런데 작은누나의 정성과는 달리, 아무도 그 밀개떡 한 개를 다 먹지 못하였다.

 

 “엄마, 집에서 먹으니 그렇게 맛있던 밀개떡이. 내가 요리솜씨가 없어선지 시집식구들 아무도 안 먹어서 다 버렸어요, 나도 맛이 없어 못 먹겠던데요.”

작은누나의 편지를 읽으며 어머니와 신나게 웃던 일이 생각났다.

 

 엊그제 그 작은누나 집엘 갔다. 예전 관 달리 꽃밭엔 해바라기와 코스모스 그리고 키다리 국화가 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작고 소담스런 꽃들을 좋아하던 작은누나의 꽃에 대한 생각이 왜 바뀌었나? 궁금하였다.

 

 “언니가 저 꽃들을 좋아했잖니, 언니 생각이 나서 일부러 심었어.”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하찮은 꽃들에 조차 기울인 작은누나의 감성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큰누나 가시고 나서 시름시름 앓던 큰 매형이 동아대 병원에 입원 했다. 병문안 한번 간다는 것이 무에 그리 바쁜지 작은 누나네 집을 들렀다가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된 큰 매형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중환자실로 옮겨져 있었다.

 

 면회를 신청하니 지정시간이 아니라 안 된다며 거절하였다. 의식도 없다던데, 이대로 돌아서면 영영 매형을 다시 못 볼 것 같아. 큰 누나 입원 때 알아둔 직원으로 근무하는 친구를 찾았다. 친구는 흔쾌히 승낙하였고 친구의 주선으로 나는 특별면회를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이 사람이 누군지 알겠어요? 알면 주먹을 한번 쥐어 봐요.”

붕대와 산소호흡기, 각종 의료 기구에 온몸이 칭칭 감긴 매형은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다. 뼈만 앙상한 손마디만 움켜쥐고 있는데. 간호사의 말에 미동도 없던 매형의 손마디가 오므라졌다. 주먹을 쥐지는 못했지만 손가락 끝의 미세한 떨림으로 매형은 내 왔음의 앎을 표시했다.

 

 멀끔한 하늘에선 줄기차게 빗줄기가 내리고 있다. 키다리국화, 해바라기, 코스모스, 작은 누나 집 화단에 핀 큰누나의 꽃들도 이 비를 흠뻑 맞고 있겠지. 큰누나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 지는 아침이다.

 

 2007년 7월5일

 

6개월 전, 큰누나의 영혼을 모시고 이곳에 왔을 때에는 겨울이라 나무도 풀도 모두들 죽은 듯 움츠려 있었다. 양지쪽 질경이만 겉잎을 움츠린 채 그나마 파란 생명의 불을 밝힐 뿐. 모든 것이 정지된 듯 슬픔만이 가득하였다. 코를 베어 문 찬바람만이 너른 절 마당을 휘젓고 다녔고, 어디엔가 쓰려고 다듬다만 나무둥치들이 마당 구석에 널려있어 나간 집처럼 원적사는 음흉스레 보였었다.

그래선지 궂은일로 찾은 내 삶도 더 위축되었었다.

 

큰 매형이 돌아가셨다. 미리 예견은 하였지만 부음 소식을 접하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큰누나만 계셨으면 충분히 더 사시었을 분이건만, 쓸쓸히 홀로 몇 달을 사시더니 결국은 그렇게 그리시던 당신의 아내 곁으로 가신 것이다.

 

언젠가 혼자사시며 얼마나 외로울 가 싶어 동래산성으로 모시고가 식사나 한 끼 대접하려 부산을 찾았었다.

 

 “고맙구나, 그런데 어쩌나. 오늘 문중일이 있어서 울산에 가는데. 맘으로 받겠다.”

할 수 없이 작은누나 내외분과 어머니만 모시고 산성엘 다녀왔다. 그러고 어버이날 온 식구들이 모인자리에서 매형은 내게 농을 던졌었다.

 

“처남, 산성에 염소고기는 언제 사줄 건데?”

이제는 그 말이 목에 걸려 울음으로 되돌아온다.

 

 원적사 작은 돌탑아래에서 쪼그려 앉아 큰누님 생각에 손수건을 눈에 가져가던 그 날이 엊그제 같은데. 처마 끝 풍경소리가 스님의 독경에 반주를 맞추고 있다.

 

돌아오는 길, 버스가 일광으로 접어들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빵집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일전에 지나갈 때 세 곳의 빵집 중 유독 한곳에만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 걸 보았었다. 그때는 아니었지만 이상스레 허접함이 뱃속에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북새통속에 바삐 밀어 넣은 쇠고기 국밥이 소화가 다 된지도 한참이나 되었다.

 

이 판국에 웬 시장 끼인지 슬프기도 했지만. 사람도 동물이어서 먹을 것엔 눈이 뒤집힌다. 그래서 매형을 누나 곁으로 보내드리고 오는 자리이건만 배고픔에 유달리 군침이 넘어오나 보다. 말이 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욕과 식욕을 버리지 못한다고. 그러나 성욕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이성으로 어느 정도 제압이 가능하지만, 식욕은 떨어지면 곧바로 죽음과 연계되기에 결코 져버릴 수 없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왕이면 좋은 것을 먹자며 기를 쓰고 돈을 벌고 또 기를 쓰고 돈을 쓰나보다.

 

어쨌든 신호등에 막혀 서버린 버스 안에서 나는 예의 그 빵집을 찾았다. 빵집 앞엔 전처럼의 긴 줄이 아니나 몇몇의 사람들이 승용차를 세워놓고 빵을 사고 있었다. 소문으로 들은 저 집의 빵맛을 매형도 누나도 보진 못하였다. 생전에 두 분을 뫼시고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깊은 한숨만 쉬다가 누군가 아는 사람을 발견하고 내 눈은 화들짝 뜨이었다.

 

 매형의 영정을 모시고 온 형님의 승용차였다. 거기서 내린, 기장이 친정인 제수씨가 값을 치루며 빵을 받아들고 있었다. 어떻게 소리칠 사이도 없이 내가 탄 버스는 빵집 앞을 통과 하였다.

 

배가 고픔으로서 우리는 삶의 희열을 느끼나 보다. 무엇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살아있어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또 다른 세상에의 시작 이란다. 언젠간 우리도 건너야할 레테의 강, 고통 받고 상처받고 힘들었던, 그리고 행복했던 모든 기억들을 다 쓸어안고, 큰 매형은 큰누나의 뒤를 따라 레테의 강을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