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수 없다
“하루 열다섯 시간을 일하면서도, 점심시간이면 제 몸보다 더 큰 배터리를 짊어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기위해, 깡그리 비좁은 다락방으로 모여들던. 그때에 휴일이란 한 달에 한번 뿐이었고, 월급은 고작 3천원 이었습니다.”
전태일 열사 40주기를 맞은 그의 동생인 전순옥씨 인터뷰기사가 눈에 뜨인다.
그의 나이가 나와 같기 때문이다.
40년 전. 1970년 11월. 그때에 전태일의 동생 전순옥은 16세였다고 한다.
같은 동갑이면서도 우연이지만, 11월13일 전태일의 온몸이 불길에 휩싸이던 날. 전순옥이 있던 청계천 봉제공장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도 같은 직종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16세 나이에.
그와 또 내가 받았던 월급 3천원을 그때의 물가와 비교해 보자.
내 기억이 정확한지 물증은 없지만. 택시기본요금이 40원. 시내버스, 문 두개 달리고 차장이 두명인 입석이 5원. 좌석은 10원이었고. 청자담배가 100원. 신탄진은 60원에 팔린 걸로 알고 있다.
말하자면 하루 임금이 담배 한 갑 값이었던 셈이다.
그래선지 전순옥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심금을 더욱 울린다.
그러나 내 세월에 묻어둔 기억을 꺼내보니, 전순옥이 말하는 노동의 현장을 한참이나 비켜서서 그가 귀담아 들었던 라디오에만 가 있다.
언제나 점심은 혼자서 사 먹어야 하는 나는 때만 되면 괴롭다.
혼자 밥을 사 먹기란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도 자장면을 먹을까 아니면 돼지국밥을 먹을까 망설이다, 그럴듯한 식당엘 용감히 들어갔다. 된장찌개를 시키며 자리에 앉았는데. 고상하게도 홀 내엔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흐르고 있었다.
그때가 천안함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때였으니, 당연히 티비에서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휘둘러봐도 티비는 안 보이고. 흘깃거리니. 카운터에 작은 전축이 있고 노래는 맞추어둔 라디오 채널에서 나오고 있었다.
예전 티비가 활개 치기 이전엔 식당은 물론 이발소 오락실 심지어 목욕탕 까지도 라디온 천국이었다. 다리가 짧아 ,판때기를 걸친 의자에 올라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릴 때엔 ,금성 포터블 라디오에선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구슬프게 흘러 나왔고. 하학 길 전파사 앞을 스쳐 지나며, 고춘자와 장소팔의 만담을 즐겨 들었다.
장터로 가는 시골만원버스에 농산물을 싣고 가며 듣던, 8시 연속극 김수현의 첫 작품인 저 눈밭에 사슴이 재방송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언제 부턴가 이런 귀로 듣는 즐거움이 주변에서 사라졌다. 눈도 못 돌리는 이발소에도 평면 티비가 걸리어 고현정의 드라마가 화려하게 나오고. 알지도 못하는 연예인들의 기운이 넘친 활보들이 어디건 활개를 친다.
진부령 험한 고갯길을 내려오는 관광버스 기사도, 손바닥만 한 화면으로 1박2일을 감상하고, 벤츠 600을 몰고 가는 아줌마도, 한손에 전화기를 들고서도 엘비스의 묵은 화면에 눈길을 두고 간다. 그래도 사고 안 나고 잘들 운전을 한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채널에 연신 리모컨을 눌러대는, 집이건 사무실이건 차 안이건. 우리는 티비 홍수 속에 파묻혀 산다. 명절에 모처럼 가족이 모여도 신나는 프로에 눈길이 고정되고, 기껏 나누는 대화도 유명연예인의 사생활에 관한 것들뿐이다.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얼마 만에 듣는 공공장소에서의 라디오 노래인가?
전태일의 분신이 시작되던 1970년 11월 13일, 그날의 점심때에도,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같은 청계천에 동료들과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수십 장의 엽서를 보낸, 정오의 희망가요 결과에 목을 매고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전태일 전순옥과 같은 시대에 같은 직종에서 일을 하였건만, 열악한 노동환경의 개선을 위한 걱정과 근심보다는, 신청곡으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더 관심을 두는 솜털을 채 벗지 못한 앳된 소년으로 지냈었다.
그러기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노동해방을 위한 전투의 중심에선 전순옥을 대하면서도, 아득한 추억 속에 묻힌 시골부모님을 위해 띄웠던 노래만 떠올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방송을 타며 즐거워했던 요즘도 줄창 불러대는 남정희의 새벽길만 흥얼거렸다.
“그때에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시던 분들이,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형편에서 벗어나지 못한걸 보고, 저는 참 놀랬습니다.”
영국에서 노동 학으로 박사가 되어 귀국하자 여기저기 정치권에서조차 손을 벌렸지만, 전순옥은 한사코 거절하고, 40년 전의 그 일터에서 다시 자리를 잡았단다.
이유는,
아직도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 시대의 노동자들 때문이라 한다.
그 시대의 노동자들.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추었다.
전순옥이 가리키는 무리 중엔 분명, 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나를 돌아보다 그 자리서 까무러치게 나는 놀래 버렸다.
전순옥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도 그런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음이니...
그래도 내겐 희망이 있고 꿈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품어온.
그 꿈의 이룸을 위해, 오늘도, 열악하다 하여도 열악하다 생각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청년 전태일이 남긴 이 마지막 말은 영원히 잊지 않고 산다.그도 별 수 없이 나와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배가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