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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트/ 뭉게구름

기찻길옆 2016. 8. 23. 05:14

뭉게구름

           정이식

 

 “과장님 여기선 담배 못 피웁니다. 밖으로 나가죠?”

담배를 든 정 과장의 손을 주 대리가 잡아끌었다.

정 과장의 눈이 계백 장군처럼 부릅떠진다.

별명인 황산벌의 후예답게 그 잘하는 유도메치기를 하려 두어 번 주 대리의 팔을 비틀다 놓았다.

 

이 짓 때문에 쓴 사표였다.

직원 단합대회에서 입사 동기이기도 한 부장을 술김에 메다꽂고

홧김에 쓴 사표는 바로 수리되었다.

 

달포를 빈둥거리다 혹시나 하며 가보라는 아내의 호통에

부리나케 달려온 천적이나 다름없는 부장의 모친상 자리이다.

 

에잇. 그래도 그렇지. 어디 죽은 사람만 제일인가?”

정 과장 발에 걷어차인 화환 한 개가 계단 밑으로 나동그라진다.

 

어휴. 지겹도록 많네. 200개는 되겠는걸. 그럼 도대체 얼마야?”

얼마긴 인마. 셈도 못해? 2천만 원이잖아. 시원찮은 새내기들 1년 연봉보다 많아.”

 

툴툴거리며 휴게실 쪽으로 발길을 옮기던 정 과장이 조화는커녕,

조문객조차 없는 어느 빈소를 무심결에 들여다보다

상복을 입은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진 정 과장은 안 대리와 주 대리,

두 대리의 옷깃을 잡아끌며 무작정 빈소로 들어갔다.

 

제가요. 당뇨를 앓아서 이렇게 몸이 부었어요.

남편이 가셨는데 글쎄, 친척들도 조문을 안 와요.”

 

한눈에도 당뇨병환자의 행색이 뚜렷한 몸이 퉁퉁 부은 여인이

갑작스런 조문객에 당황해 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마구 쏟아낸다.

 

아니, 뭔 그런 일이 있데요? 기별을 넣었는데도 조문을 안 온다, 이 말씀 아닙니까?”

 

주대리가 쪼그려 앉으며 여인을 바라본다.

가난한 여인의 집안엔 식구 세 명이 모두 환자였다.

간질 중증환자였던 고인은 노년의 거의를 누워서 지냈다.

 

 여인도 당뇨합병증으로 일을 못하고

수입은 젊은 아들에 전적으로 의지하지만

아들 역시도 간질 증상이 있어서 일용직으로 근근이 살아간다고 하였다.

 

남편이 세상을 뜨자 간질병으로 죽었다고 친척은커녕

이웃도 안 와서 복지사의 도움으로 시에서 장례를 치러준다고 한다.

제단 앞의 반단 화환 두 개엔 시장의 이름이 적혀있다.

 

. 안주야, 나 따라와.”

그놈 불같은 성질이 이럴 때에도 먹혀든다.

안대리 주대리가 이럴 때엔 안주로 바뀐다.

정 과장은 식식대며 앞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 안 대리. 저 아래 직원들 갖다 줘라.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오잖아.”

따라온, 아니 끌려온 안 대리에게 문상객 대접용으로 차려놓은

술과 고기를 닥치는 대로 상자에 담아 건네고 계단에서 어정거리는 주 대리를 불러 세운다.

 

이것 봐라. 받침대가 쭈그려졌잖아?

너들 뭐하냐? 부장님 잘 모시려면 화환도 잘 모셔야지. 냉큼 고쳐와.”

 

호통 치며 주 대리에게 화환 한 개를 건네고 눈을 찡긋 거린다.

 자신도 곁에 있는, 멀쩡한 화환을 들어서 한 쪽 어깨에 둘러메었다.

 

그래. 이제야 구색이 맞구먼.”

 

아래층 빈소 앞에 두 개의 화환을 세웠다.

국회의원 김 아무개와 이 아무개.

이름이 잘 보이도록 리본을 반듯이 펴놓고 정 과장은 씩, 웃으며 빈소로 들어간다.

 

이런? 썩을 놈들. , 조문도 안 하고 음식부터 챙겨? 일어나, 일어나.”

자리를 깔고 술과 음식을 차려놓던 두 대리의 인상이 한껏 찡그려진다.

어정쩡하게 일어나며 안주머니에서 꺼낸 몇 장의 지폐를

정 과장은 빼앗아 부의금 통에 넣고 빈소에 술을 돌린다.

 

아버지처럼 간질병을 앓고 있다는

젊은 상주와 맞절까지 하고 나서 술자리로 돌아왔다.

 

정부지원금이라도 받는가요?”

뜻밖의 손님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여인은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한다.

 

지원이라뇨? 아들아이가 직장을 다녀서 혜택을 못 준 다네요.”

세상 참 안 고르네. 있는 놈들이 더해요. 부장도 마찬가지야.”

 

괜한 직장 상사 부장을 술안주로 씹기 시작한다.

말은 많아지고 빈 술병은 쌓여가고, 그러다가 정 과장의 정신은 자꾸만 멀어져갔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도 없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정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차, 오늘 회의하는 날인데.”

 

놀라며 시계를 보았다. 11시다.

회의는 9시에 시작하니 이미 끝났을 것이다.

자신은 참석도 안 했으니 구명이니 소명이니 하는 것들 다 물거품이 되었음은 불 보듯 뻔하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은 아무나 하나.”

머리맡에 던져둔 휴대폰이 신나게 노래를 불러 젖힌다.

 어제 같이 술을 마시던 주 대리다.

 

과장님 어째 정신이 좀 드십니까? 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요?”

. 어찌 된 거야? 도통 기억이 없으니.”

 

참 내. 그럴 줄 알았어요. 제가 모셔드린 것도 기억 안 나죠? 지금 삼천포로 가고 있습니다.”

삼천포? 왜 삼천포로 빠지는데?”

 

아하, 우리 과장님 진짜 취했나 보다.

, 삼천포까지 따라가서 유해를 바다에 뿌리는 것 도와주라 했잖아요.”

내가 그랬나? 허허.”

 

상주 아주머니 있잖아요. 과장님 좀 바꿔주래요.”

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기는 여인에게로 건네졌다.

 

과장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애들 아버지도 편안하게 가셨을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아. . .”

 

정과장은 별다른 답을 할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자기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네네 소리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담배가 어디 있나 주머닐 뒤지는데 주 대리로부터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과장님, 담배 피우려 했지요?”

정과장은 화들짝 놀라며 보는 사람도 없는데 담배 든 손을 뒤로 숨긴다.

 

, 인마. 담배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내가 담배피우는 것 네가 봤냐? 봤어?”

제가 천리안인 것 모르시죠? 그건 그렇고 전화는 왜 끊어요?”

 

뭐야. 인마. 다 끝난 것 아냐?”

, 진짜. 인마. 인마하지 마시고요. 할 말이 있거든요?”

할 말? 다 했잖아 인마.”

 

또 인마? 하하하. 회사 임원 회의는 과장님 소명 듣기위해 열렸는데 왜 안 오셨죠?”

그걸 말이라고 하냐? 뻔 한일인데 내가 뭐하러가?

그런 말은 또 왜 하는 거야? 누구 속에 불나는 꼬락서닐 보고 싶어?”

 

불이라뇨. 내가 부채질이라도 할 줄 아셨어요?

, 술을 자셔서 못 갔다고 하면 누가 잡아먹는다나요?”

 

자식이 정말. . .”

. . 진정하시고요. 진짜 할 말을 하겠습니다.

이 소식 듣고 벌렁 안 나자빠지면 우리 과장님이 아닙니다.”

 

약간의 뜸을 들인 후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주 대리는 말을 이었다.

 

조퇴하기 전에 상무님께 어제 빈소 일을 말씀 드렸어요.

 해명이 부족하지만. 이전 일은 과장님 술버릇이 안 좋아 일어난 일이고

그 뒤로 과장님은 술을 딱, 끊었다고요. 담배도 물론이고요.”

 

. 인마. 주대리. 내가 숨넘어가시겠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상무님이 부장님 조문하러 올라가려다 국회의원 화환을 본 모양입니다.

어떤 유명인이 돌아가셨나? 빈소를 빠끔히 들여다보는데 아 글쎄,

과장님이 거기 있더라는 겁니다.

 

내가 처음부터 있었던 일을 빼놓지 않고 다 말했습니다.

상무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그 친구 그런 면도 있네? 참 잘한 일이야.’ 하시더니

회의에서 적극적으로 과장님 구명운동을 하셨나봅니다.

살려냈으니 내일부터 당장 출근하라네요.”

 

출근? . ? 뭣이라? 내일, 나더러 출근하란 말이란, 아니 말이냐?”

 

전화기를 잡은 정 과장의 손이 크게 흔들린다.

목소리도 따라 떨려 나온다.

그러면서 명치끝에 도사리고 있던 묵직한 그 무엇이 툭, 어디론가 떨어지며 사라진 기분이 든다. 

 

그래요. 복직되었단 말입니다. 이제 아시겠어요?”

그래. 너 나 때문에 진짜 애 많이 썼다. 허허. 저녁에 만나자. 내가 근사하게 한잔 쏠께.”

 

술 끊었다고 했잖아요.

술 이젠 잡숫지 말고 돈 있거든 사모님과 오붓하게 저녁이나 한 그릇 하세요.”

인마. 아니. 주대리. 허허. 복직이라니. 알았다 알았어. 허허.”

 

정과장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술도 또 담배도 하지 않으리란 다짐을 하며 창문을 열었다.

멀리 뭉게구름이 둥실, 산허리를 지나간다.

복직 안 되면 콱, 죽어버리려 생각할 때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하늘이고 또 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