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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글을 쓸 뿐, 작품의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기찻길옆 2020. 2. 29. 19:37

      

 

 

 돌아온 탕자/렘브란트

 

 

 

 

 

                      최후의 만찬/다빈치(아래 사진은 중요부분의 확대.)

 

그림을 그릴 줄은 몰라도 보는 것은 엄청 좋아하여 전시회장을 시간만 나면 자주 찾습니다.

한편의 그림 속에 들어 있는 작가의 마음을 찾아내는 재미가 하도 쏠쏠하여서입니다.

오늘도 그리하여서 부산의 큰집에 다녀오는 길에 광복동 어느 화랑에서 아는 분의 그림 전시회가 있어서 둘러보았습니다.


글을 쓰는 작가의 마음을 헤아리려면 작품인 책을 다 읽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림은 한눈에 들어오기에 책을 잃는다는 딱딱함 보다는 훨씬 생각을 이끌어 내기가 쉬워서 가볍게 전시회장을 찾곤 합니다.


평생을 잡문에는 손대지 않고 올곧게 소설만을 고집하신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은 제자들이 작품의 해석을 요구하면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로 답을 대신하였다 합니다.

“작가는 작품만 쓸 뿐, 작품의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요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린다는 뜻의 화가 보다는 그림을 만든다는 뜻의 그림 작가로 불리길 더 원하고 있습니다. 화가나 작가나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예술인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네덜란드 화가인 렘브란트가 돌아온 탕자에서 오른손을 왜 여자 손으로 그렸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고 떠나갔기에, 거기에 대한 정답을 놓고 많은 독자들은 의견을 달리 합니다.


탕자를 반기는 아버지의 여성적 마음이라고도 하고, 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임을 알리기 위함이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렘브란트는 작품에 대한 해석을 남기지 않아 타임머신을 타고 350년 전으로 돌아가 그를 만나지 않는 한 진위를 알 수는 없습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는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다빈치의 걸작인 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여인이며 이는 막달라 마리아로서 예수의 아내라는 작가의 생각에서부터 소설은 출발하고 있습니다.


뚫어져라 최후의 만찬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500년 전의 다빈치가 예수의 부부애를 그림 속에 상징으로 남겨두었다는 확실하지 않은 무서운 이야기에 많은 독자들은 열광 하고 있습니다. 다빈치 또한 해석은 없이 작품만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총성으로 문이 닫히기 보름 전 나는 금강산에 갔었습니다. 금강산 온천장 2층의 그림전시장에서 북한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흔하지 않은 그림들이라 기쁜 마음에 전시장에 들어섰지만 수확은 기대 밖이었습니다.


나는 그림에 대한 전문 지식은커녕 기초지식도 없습니다. 그저 그림보기를 좋아하여 전시장을 쫓아다니며 나름대로 그림을 보는 기준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이런 내가보기에도 북한 그림들은 작가의 주관적 정신이 없는 객관적 사실만 그대로 화폭에 담아 놓은 듯 보였습니다.


아마도 북녘에는 생각이나 모든 바람이 민족의 태양이라는 신격화된 한사람에게만 쏠려 있어서 개인감정이란 나타낼 수 없는 비극적 모럴이 숨어 있어서가 아닌 가 심려 됩니다.


그림의 품질을 알 수 없는 일반 독자들은 값에 의존하여 등급 매기기를 좋아합니다.

고속도 휴게소등, 요즘은 그림 판매장이 사람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있어서 거기에 매겨진 그림의 값을 보고 유사한 그림을 전시회에서 보며 작가의 실력을 도마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판매를 목적으로 그린 그림들에는 작가의 혼이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는 흔히들 이발소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들과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혼이 실린 작가들의 그림에는 정해진 일정한 가격. 즉 정찰가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림을 사려면 미술시장이 아닌 전시회장을 찾으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싶습니다.


그래도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우리들은 미술품 경매에서 이뤄지는 높다란 그림의 가격에서 작가의 위상을 우러를 수밖엔 별 도리가 없습니다. 난해한 피카소 그림을 보고 값을 매기라 하면 소주 한 병 값만도 치지 않을 위인들이 세상엔 수두룩하니깐 요.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경매시장의 으뜸으로 늘 상상으로 판매가 됩니다. 물론 팔지도 또 경매장에 나오지도 않을 것이지만 수집가들의 상상에 의해 천문학적 가치의 값으로 모나리자는 매겨진답니다. 나 개인적으로도 제일로 원작을 보고 싶은 그림이 모나리자입니다.


요즘은 그림에 대한 기초지식은커녕, 그리기 지도 한번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제 멋대로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명 소박 파 작가들이 많은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틀에 박힌 그림의 구조를 벗어나 예상을 뒤엎는 기법으로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그리기의 기초적인 구성이나 원근법등, 이런 것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색체만 요란하게 덧칠하며 작업을 하는데, 그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그림의 기본 틀은 당연히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그런 그림들은 새로운 감각에 목말라 하는 독자들에게 생동감을 주기에 충분한 요소를 지녔음은 분명합니다.


금강산에서 내가 본 북한 화가들의 작품 중에 리경남이란 인민화가의 겨울 봇나무 숲이란 그림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12그루의 자작나무를 앞 열에 배치하여 어둔 겨울을 밝게 보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여 작가의 숨은 위상을 탐지 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사진을 찍어오지 못하여 내겐 큰 유감이었습니다.


그림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북한 문인들의 정신세계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소견이 좁아서도 이지만 아찔한 연유로 얻은 조선작가동맹(우리의 한국문인협회)부위원장인 리호근 시인의 시집을 얻어 내리 읽어 보았지만 그림과 다른 점 없이 신격화된 한 사람에게로의 모든 집착이 되어 있어서 나로서는 작품의 가치를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문인이면서 그림을 가까이 하려하는 이유, 물론 합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유년의 기억이 그대로 도사려 있는, 아버지는 그때에 사회운동가로 활동하셨는데 취미로  먹물을 찍어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어릴 적 살던 광산촌의 샛강은 선광장에서 흘러나온 폐수로 시커먼 흙탕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시큼한 악취가 섞인 샛강은 물고기 한 마리 살수 없는 죽은 강이었고. 아버지는 그 강물을 마시고 살아야 하는 민초들의 억눌린 감정들을 그림 속에 검은 풀들과 나무, 검은 소로 묘사한 카툰을 발표 하셨다가 군사정권에 의해 호된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그림을 통하여 민중의 울분을 전달하려는 아버지의 생각을 그대로 읽은 당국에 의한 무자비한 탄압이 그때부터 시작되어, 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은 아버지의 그림처럼 온통 검은 먹물 속에서 웅크린 채 지금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독자들은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모든 매스컴들이 생각을 아예 담지 못하게 만듭니다. 출연자들의 생각을 독자스스로가 알기 전에 미리 자막으로 담아내어 국민 모두를 바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진취적인 생각은 치매예방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림을 보며 그림 속에 저며 있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내는 일들은 우리의 쇠퇴해진 뇌의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는 좋은 일들입니다.

그럼으로써 엔도르핀 500배의 효과가 있는 물질 호르몬인 다이놀핀 생성에 직접적 영향을 주어 우리를 더욱 젊게 만들 것입니다.


그림과 문학을 통틀어 예술이라 합니다. 예술은 모든 분야에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삶에 특별한 윤활유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그걸 보고 뭔가를 느끼는 것이 필수 인데, 극히 일부만 가능하다면 그건 감상자의 무식함이 원인이 아니라 작가의 작품이 예술품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말했습니다.


예술 .즉 그림이나 문학은 결론이 감동이지요. 감동이 없는 작품은 예술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린 어디에서 감동을 찾을 수 있을까요? 생각을 많이 하여야 합니다. 그림에서의 미세하게 보이는 티끌하나라도 찾아서 작가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이 없으면 감동은 쉬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웃으면 생성되는 엔도르핀과는 달리 그 500배의 효력이 있는 다이놀핀은 감동에서만 생성이 됩니다. 감동은 즉 눈물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많이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에게도 감동의 눈물을 많이 선사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