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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아니거든요?

기찻길옆 2020. 3. 12. 21:27

나이 탓인지 삽질 두어번 했더니 허리가 뻐근하다. 퇴근 때엔 몸이 솜뭉치다.

스스로 쌓은 덕이다.

안 해도 될, 잡부 일을 해서다.

 

요즘 노가다 진짜 일 안 한다.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맹하다.

시켜도 하는 둥 마는 둥이다. 이럴때엔 눈에 천불이 난다.

시키느니 내가 하는 것이 더 낫다는 내 지론에 나만 피곤하다.

 

30분 쯤 걸으면 집인데 버스를 탔다.

요행히 빈자리가 있어 덜렁 앉았다.

앉고 보니 자리색이 분홍이다.

 

분홍색. 임신부를 위한 좌석이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누군가가 자꾸 힐난하는 기분도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임신부는 천연기념물이다. 그 만큼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아이 많이 낳으라고 버스마다 특별히 임신부 자리를 마련했다.

 

 대한민국 성숙한 국민들은 만원버스라도 임신부 자리는 비워두는 걸로 안다.

그걸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내가 훔쳐 앉았다.

갑자기 자리가 가시방석이 되었다.

 

버스안의 승객이 전부 나를 쳐다보는 듯 했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려니 또 체면이 말이 아니다.

 

 눈을 감았다.

언제였던가? 가족 넷이서 대만자유여행 갔을 때 생각이 떠올랐다.

 

 45일의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아들은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오후에 날아갔다.

김해행 비행기는 자정 넘어 뜨기에 딸아이의 계획대로 우라이 온천에 가기로 했다.

 

중정기념관 근처에서 버스를 타니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돌아오는 길은 어둠이 깔려선지 종점에서부터 버스는 만원 이었다.

 

10분쯤 갔을까? 문 곁에 서있는 내 옷깃을 어떤 여인이 흔들었다.

 말을 걸었지만 내가 알지 못해서이다.

 

 대만 말을 알지 못하는 나는 그냥 코리아 코리아라고 외쳤다,

여인은 그때서야 내가 외국인이란 것을 알았는지 환하게 웃으며

 베이비베이비 하며 손으로 둥그렇게 배를 그렸다.

 

 무슨 뜻인지는 여인이 손가락으로 딸아이를 가리켜서야 알게 되었다.

 흘깃 딸아이를 쳐다보다 그만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온천에서 나오며 딸아이는 풍성한 원피스를 입었다.

내가 봐도 임신복 같았다. 졸지에 딸아이는 임신부로 오해를 받았다.

이 여인은 서 있는 임신부를 자기자리에 앉히려 애를 쓰던 것이다.

 

국가의 위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작은 정성에서 우러나온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로 알고 있는데

대만국민의 기본감정은 우리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내가 임신부 자리에 앉아 가다니.

더구나 그때의 딸아이가 지금은 진짜 임신복을 입고 있는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온몸에 또 경련이 일었다.

 

 버스가 정차하고 누군가가 올라오며 내 옆에 섰다.

이때다 싶은 나는 얼른 일어나며 자리를 양보했다.

내리려는 것처럼 비실대며 문가로 갔다. 흘깃 돌아보니 50대 중반쯤의 여인이었다

내 눈길이 닿자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서슴없이 흉측한? 말을 뱉었다.

 

임신, 아니거든요?”

뭔 말인감? 임신 아니다니?

 

자연스레 눈길이 여인의 배에 머물렀다.

임신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여인의 배는 임신 중인 내 딸아이 배보다 더 불러있었다.

 

황당해진 나는 버스가 정차하자 바로 내렸다.

집까지는 두 정류장을 더 가야 하는데도

다시는 임신부 자리에 앉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