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휴가를 받았어도 딱히 갈 곳도 없어서
뒷짐을 지고 동산이라 부르면 더 편한 산엘 올랐다.
20여년을 살면서도 발길조차 주지 않던, 산은 그래도 더위를 조금은 비껴가 있었다.
나무는 또 나무대로 도심 한가운데 이지만 빼곡히 커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질경이 풀들로 가득 찬 오솔길도 있어서 명상에 잠기며 차분히 걷는
그 곁으론 작은 땅이라도 놀리지 않으려는
억척스런 농심들에 의해 시퍼런 채소들은 더운 여름을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푸릇한 풀 향기가 좋아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쪼그려 앉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불어오는
예사롭지 않은 바람에 나는 문득, 눈을 감고 큰 숨을 들이켰다.
아!
그것은 이 나이에 이르도록, 한시도 잊지 않고 있던 내 아버지의 향기였다.
고개를 돌려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산비탈 옆, 몹쓸 병으로 잘려진 나무들 틈새로 한 무리의 더덕들이 자라고 있고,
바람은 무성한 이 더덕들의 잎을 휘어 감고서
내게 그리운 아버지의 향기로 다가온 것이었다.
더덕은 자연 상태에선 향기가 곧은데 재배를 하면 그 향은 바로 사그라져 버린다.
아마도 저 더덕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닌 제 홀로 태어나서 훌륭히 커왔지 않나 싶다.
내 어릴 적,
우리 집의 울타리엔 저렇게 무성한 더덕 잎들이 초만원을 이루었었다.
그러니깐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나던 해,
중학 1학년인 형과 함께 한계령 깊은 골로 고사리를 끊으러 가서는,
커다란 더덕 밭을 만나 고사리는 팽개치고 더덕만 가득 망태에 담아 왔었다.
어머니는 밤새 우리가 캐온 더덕을 골라 큰 것은 다음날의 장에 내다 팔았고,
작은 것은 버리기 아까워 울타리 사이에 심었다.
그러고 잊은 듯 지낸 며칠 만에
더덕들은 저마다 순을 내고 울타리를 기어올랐는데,
그 크는 속도가 어찌 빠른지
한여름이 시작되는 7월경에는 내 키만 한 싸리 울타리를 훌쩍 뛰어 넘어,
파랗고 하얀 이파리들이 반짝거리며 나풀대는,
이사 기념으로 아버지가 심은 두 그루의 은사시 나무까지도 감고 올랐다.
그때의 산골 여름 해도 한낮은 지글 거려서,
청봉 그림자가 마을 안쪽을 휘감아도 그 더위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동네에선 우리 집 마당이 제일 시원하여
해지면 몇 집 안 되는 마을 사람들 아이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우리 집을 찾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 집을 찾는 이유는,
도심지에서 살다 온 내 어머니의 구수한 재담도 있어서 이지만,
동네 유일의 이가 시리도록 찹찹한 샘이 바로 우리 집 앞에 있어서 이었다.
저마다 들고 온 바구니를 놓고 감자 껍질을 벗기 우면
나는 동네 어른들을 위해 낮에 베어두어 까탈까탈 마른 쑥부쟁이로 모깃불을 놓았다.
그러 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곡식 낱알을 켤 때 쓰는 키로 부채질을 해대었지만,
가라는 연기는 안가고
울타리 새 뻗어 오른 더덕향기만 알싸하게 멍석자리를 내리 덮고 앉았다.
깊은 산속에서 농 익은 더덕 향은 매우 감미로워서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집에 심어도 2년쯤은 자연향이 사그라지지 않는 덕이기도 했다.
또 더덕은 꽃을 피우고 씨앗도 맺혔는데,
그때의 우리 집 울타리는 진 보라색 초롱꽃들이 줄기를 따라 너무 많도록 피어,
따로 꽃밭을 두지 않아도 될 만큼 동네에서 제일로 아름다운 집이 되었었다.
울타리 곁에는 키다리 국화와 함께 심어진 아버지의 꽃인 달리아도 있었다,
하얗고 노란 키다리 국화보담 붉은 달리아 꽃이 너무도 탐스러워,
간혹 바깥사람들이 집에 들어서면
찐한 더덕의 향기가 붉은 달리아 꽃에서 나는 줄 착각도 하였었다.
기억이 시작되 안된 6살에 일본에 들어가,
거기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며 익히던 이야기들로,
사람들을 웃음과 눈물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어머니의 기막힌 언변에 도취되어 밤이 깊어도 사람들은 돌아갈 생각들을 안했다.
별스레 할 일없는 나만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까만 하늘에 찍혀있는 유난히도 많은 하얀 별들을 수도 없이 헤아렸다.
별 하나 나하나 하고...
그러다 모두가 돌아가고,
이슬을 맞게 안하려 어머니가 멍석을 말며 잠든 나를 깨우는 중에도,
소곤거리듯 부는 바람에 실려
더덕의 향기는 우리 집 빈 마당을 떠나지 않고 남아 밤을 지새웠었다.
그 더덕의 향기를,
나는 바깥사람들처럼 붉은 달리아 꽃에서 난다고 애써 믿으려 하였었다.
뿌리로 생명력을 이어가는 달리아는
열매를 맺기 위해 벌 나비를 부를 필요가 없어서
향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배워 잘 알면서도 말이다.
언젠가 꽃 속에 얼굴을 디밀고 향기를 찾던 나에게 어머니는 말했었다.
“네 아버지의 꽃이야. 아버지의 향기는 마음속에 있어.”
빗물이 올곧게 큰 자작나무들처럼 땅으로 곤두박질치던 어느 날,
알토란 넓은 잎을 머리에 쓰고 학교에서 뛰어 돌아오니 아버지가 와 계셨다.
아버지는 사립문을 밀치는 나를 보았음직도 하건만,
시선을 한곳에 둔 채 움직이지 않았었다.
대추 빛 그 얼굴보다 더 검붉은,
아버지는 달리아 꽃을 넋을 놓듯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또 당신의 아내보다 더 달리아를 좋아한다고 나는 삐뚤어진 생각을 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시 영어의 몸이 되었을 때에
시새움에 불탄 나머지, 달리아 몇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버렸다.
어머니의 괴로움도 모르던, 참으로 철부지인 나 였다.
그날 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어머니로부터 심하게 종아리를 얻어맞았다.
“그 꽃은 네 아버지의 희망이야.”
매질을 하다말고 어머니는 서러움이 북받치는지 나를 안고 울었고,
고운 어머니의 볼로 하얀 진주 방울이 총총 떨어지던
그 순간순간에도 찐한 더덕향기는 풍겨 나와,
멀뚱멀뚱 문밖의 달리아만 바라보고 있는 나를 비켜 방안을 뱅뱅 돌아다녔다.
그때부터 나는 그 향기를 아버지의 향기라 이름 지었고.
또 그 향기는 아버지의 꽃인 달리아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만의 그리운 대상이 아니란 것도
또 아버지란, 돌아가셔서야 그리운 존재라는 것도 그때에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하였었다.
저기,
보라색 초롱꽃들이 피어 탐스럽게도 달려있는 어쩌면 외지다고 할 산길에,
추억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아버지의 향기는 살아 있어서
유연하지 못한 삶을 이어가는 내 아픈 속을 어루 만져주고 있다.
그러며 돌아본다.
나는 또 내 아이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어떤 향기로 비추어 질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