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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노래/난닝구 부대와 밤배.

기찻길옆 2012. 1. 14. 19:59

 

열아홉인가? 로 기억되는 청년기의 시작에

나는, 지지리도 못사는 촌 동네에서 4에이치 회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여름,

면 연합회주최로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를 하게 되었지요?

안타깝게도 마을 어른들의 무관심 탓에 우린 참가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20여 가구, 관내에선 가장 적은 자연마을이 우리 마을이었답니다.

 

게다가 좀 괜찮은 젊은이들은 도시로 다 떠나서 선수로 기용할 선수조차도 없었고요.

얼마 안 되는 경비조차도 내 놓을 형편이 못되는 호롱불 켜고 사는 빈촌이라,

맡아놓은 꼴찌라면 참가하지 말라, 마을 망신 다 시킨다.이게 어른들이 반대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꿈이 있으면 그 꿈을 이루어나갈 길은 틀림없이 열립니다.

 

근처 군부대 중대장님이 마을에서 살림을 하였습니다.

중대장 사모님이 학창시절에 운동을 좀 하였다 하데요.

전적으로 지원을 해 주겠다고, 해서 전 과감하게 축구와 배구 육상에 참가 신청을 하였습니다.

 

자기 땅덩어리 하나 없어도 언제나 바쁜 삶이 농촌 생활입니다.

해거름 녘,

겨우겨우 회원들을 소집하여 한두 시간 볼 이어받기 정도로 끝나는 연습이었지만 코치를 자청하신 사모님의 열정도 그렇고 선수 누구도 연습에 게을리 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유니폼 때문이지요.

타 동네 아이들은 멋진 스타킹에 등번호도 선명한 유니폼을 입고 보란 듯이 활보를 하는데. 우린 엄두도 내 볼 수 없었거든요.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다고 좋은 묘안이 떠오르데요.

당장 실행에 옮겼지요.

 

난닝구.

하얀 메리야스, 요즘 말로는 러닝셔츠. 그때의 우리들은 난닝구라 불렀지요.

나일론 장판을 오려내어 번호를 파고 난닝구 등 뒤에 대고 구두약으로 들입다 문질렀습니다.

 

멋진 등번호가 나왔습니다.

기가 막힌 내 발상에 모두들 박수치며 좋아 했지요,

구두약칠 된 난닝구는 빨아도 쉬이 글이 날아가지 않았거든요?

12번. 등번호 12번이 그때의 내 난닝구 유니폼입니다.

 

자, 드디어 8월15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수입장을 하고 보니. 아하,

이런, 모두가 빨갛고 파란 유니폼들을 멋지게 입었는데.

하얀 난닝구 부대는 우리뿐 아닙니까? 게다가 일부는 고무신을 신었고요.

 

여기저기서 난닝구 부대 떴다며 비웃음을 흘리더군요.

서글프기도 하고 또 화도 좀 났지만 뭐 어때요? 경기만 잘하면 되지, 하고 분을 삭였습니다. 하지만 오기로 축구를 이길 순 없지요?

 

땀이 비 오듯 흐르자 흙먼지와 뒤섞인 난닝구는 천근무게로 달라붙고, 이건 아니다 싶은 내가 먼저 훌쩍 난닝구를 벗어던졌습니다.

 

같은 심정이었던지 다른 선수들도 모두 따라 벗었지요.

그렇게 알몸부대가 되어 열심히 공을 쫓아다녔지만 결과는 7대 빵이란 비극만 낳았습니다.

 

그래도 배구는? 하고 축구경기 끝나자 배구장으로 달려갔는데. 중고생들로 이루어진 여자배구도 깨지고 있는 겁니다.

부아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는 타임을 걸고 선수교체를 했습니다. 수석코치로 명명된 중대장님 사모님을 투입했지요.

 

난리가 났습니다. 코트를 훨훨 나는 사모님을 보고 부정선수라며 아우성들을 치는 거지요.

좀 봐줘라. 어차피 이번 세트 우리가 이겨도 탈락이다. 그렇게 사정하여 경기는 그대로 진행되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을 어른들의 지적대로 우린 전체 꼴찌를 하였지요.

 

돌아오는길.

 

뜨겁게 달구어진 신작로를 터벅거리며 걷는 회원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부끄럽기 보다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덤벼든 경기가 너무 처참하게 져서이지요.

가난한 부모를 둔 죄로 난닝구 유니폼을 입게 된 서러움도 한 몫 했고요.

 

어디 그뿐입니까?

밥다운 밥은커녕, 불어터진 라면으로 때운 점심은 왜 또 그리 서운하였던 지요.

발끝만 보고 걷는 저 말없음표들 중에는 내게 대한 원망도 엄청 쌓였을 겁니다.

 

그때에 꽁무니에 먼지를 달고 오는 한 대의 군대 쓰리쿼터가 보였습니다.

총알같이 나타나서는 우리 곁에 “끼익.” 하고 섰습니다.

 

“애들아 타라.”

 

아!

배구경기 끝나고 안보이던 중대장님 사모님이었습니다.

언제 군부대까지 가서 차를 데리고 나왔는지,

구세주를 만난 양 회원들은 너무도 좋아했습니다. 얼싸 하고 올라탔지요.

 

음식의 맛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손끝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하고, 어디서. 이 두 가지가 다 갖추어져야지만 훌륭한 진수성찬은 탄생되지요.

 

부대에 들어서자 열렬히 환영해 주던 군인 아저씨들,

부랴부랴 끓여 내온 라면국물에 찍어먹던 군용건빵의 맛.

하늘에서 내린 음식이 있다 하여도 그토록 맛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군인아저씨들은 자기 친동생보다 더 살갑게 맞이하여 주었는데. 중고교 학생들로 짜인 우리 여자배구선수들, 주소 적힌 쪽지 무지하게 많이도 받았었지요. 요즘말로 인기 짱이었습니다.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난닝구 부대, 진짜부대에선 환영받은 것이지요.

 

해거름에 우린 군인아저씨들과 같이 너른 잔디밭에 뒤 섞이어 빙 둘러 앉았습니다.

중대장님과 사모님은 기타를 치고, 우린 아저씨들과 노랠 따라 불렀지요.

 

“검은빛 바다 위를 밤배 저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봐 한없이 흘러가네.”

간간히 읍내 전파상 앞에서 듣긴 했지만 직접 따라 부르긴 처음인 둘다섯의 밤배 노래였습니다.

 

모자란 선수를 채우려 동원된 초등 5학년 어린 회원들부터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30대 노총각 회원까지, 눈물이 나도록 부르고 또 부르던 노래. 밤배 또 밤배.

한계령 너머에 널리 퍼진 그날의 노을은 또 얼마나 아름답던지 요.

 

성인이 된 뒤에 알았지만,

1973년에 어니언스의 편지와 함께 밤배는 그해 최고의 인기곡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합디다.

 

그렇게 알게 된 밤배 노래를 노트에 가사를 베껴 적고서는. 김매러 밭으로 가거나, 나무하러 산으로 가거나. 밤 되어 호롱불아래 새끼를 꼬면서도, 우린 밤배를 부르고 또 불렀답니다.

 

지금까지도 애창곡이 되어서 모임 때에 노래할 기회가 돌아오면 서슴지 않고 나는 이 노래를 부릅니다.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텐가 아~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가진 것 없어도 꿈은 많았고,

땀으로 흙투성이가 된 난닝구를 입고 달렸어도 영혼은 눈처럼 맑고 투명했던.

우리 4에이치 회원들과 중대장님 그리고 사모님.

 

모임이 있어서 노래방엘 가고, 그래서 밤배 노래를 부르노라면,

가슴 한편에 뭉게구름처럼 알싸하게 솟아오르는 그때의 난닝구 부대 기억이 떠올라,

지금의 나처럼 눈물을 글썽이지 않을까요?

 

추억은 아름답고 언제나 소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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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이야기가 있는 노래’ 란 주제로 친구인 현역스님.

산청 단계의. 무담스님이 계신 산사에서 송년회를 가졌습니다.

 

그때에 제가 꺼낸, 이야기와 노래입니다.

버리려니 너무 안타까워서

기억을 더듬어 글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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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배 - 둘 다섯

검은 빛 바다위를

밤배 저어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흘러가네

밤 하늘 잔 별들이

아롱져 비칠 때면

작은 물을 저어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텐가아~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아~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