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나요?

기찻길옆 2013. 11. 11. 20:43

계절은 틀림없는 가을이지만, 한낮은 이글거리는 태양 빛이 겨드랑이속 땀샘을 자극하여 어디를 다니기가 그리 수월치가 않다. 돌변하는 기상 탓이라지만, 먹고 살기 바쁜 우리 소시민에겐 환경 재앙 등 먼 훗날의 지구 이야기가 귀에 솔직히 들진 않는다. 그래도 해지면 드는 바람은 시원하여 밤길을 자주 걷는다.

 

그것은, 뜻하지 않는 객지 생활이 아직은 익숙지 않아 먼 길을 걸어서라도 피시 방을 찾으려기 때문이다. 그래서 든 인터넷엔 지척에서 만나지는 지인들이 있어서 혼자라는 외로움을 달래어준다. 하지만 가마 탄 사람은 빨리 죽고 가마 멘 사람은 오래 산다는 옛말이 무색하게도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욕심은 예나 제나 변하지 않는다. 걷기가 부담스러워진 나는 집에 있는 자전거를 가져왔다.

내게서 자전거는 올 들어 세 번째이다. 두 번이나 사연 깊은 자전거를 잃어버린 뒤에는, 다시는 자전거 사지 않겠노라고 마음 다짐을 하였었다.

어느 날, 보너스카드 점수가 많다며 선물을 골라 가지라고 단골 주유소에서 연락이 왔다. 몇 년째 나 몰라라 버려둔 그 보너스카드엔 꿰나 포인트 적립이 많이 되어있어서 좋은 선물이 잔뜩 포장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기쁜 마음에 고른다고 고른 게 지금의 이 접이식 자전거다. 이번엔 잊어버리지 않으려 8층인 내 집 앞 계단에 비틀어 매어놓았었다.

승용차 트렁크에 싣고 온 상표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름도 좋은 삼천리 표 접이식 내 자전거는, 아직은 새것이어선지 페달 돌아가는 소리도 경쾌하다. 그래선지 보이는 것 또한 경이롭기 짝이 없다. 둘레둘레 주변을 살피니, 바닷길을 따라 곡선으로 이어진 철로 변엔 시퍼런 옥수수 대공이 한창이다.

이상스레 우리나라 기찻길 옆엔 옥수수가 많이 심어져 있다. 전엔 그리 달갑게 보이지 않던 옥수수 나무가 오늘따라 한층 더 싱그럽게 보인다. 아마도 추억 속에 묻혀있는 아니, 잊을 수 없는 기찻길 옆 노래 때문이리라. 기차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는.

한바탕 예정에도 없는 빗줄기가 큰길에 쏟아져 유형무형의 물질들을 휩쓸고 바다로 나가서인지 동네 초입은 내 그리움 속 오두막집 앞길처럼 아주 깨끗하다. 같은 난전 일을 하는 일부 근로자들이 옥수수 잎이 늘어진 철길 옆에 앉아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다. 작은 깡통 맥주를 하나씩 들고 소담스레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보니 아직은 그리 술 배가 고프지 않은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저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을 문득, 해본다.

못 산다 못 산다 아우성쳐도 마실 건 다 마시고 하고 싶은 건 다하고 사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내 소싯적엔 저런 자리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들기도 어려웠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버스 한 대가 작은 면 소제지, 그렇지만 중앙임이 분명한 도로를 온통 차지하고 있다. 앞차 떠난 지 십여 분밖에 안 되었는데도 벌써 버스는 와서, 혹시나 있을 손님을 부르며 뿡 빵 제멋대로 경음기를 울린다.

도농 통합이 되며 실보다 득을 더 많이 얻은 시골 읍면 이다. 택시론 몇만 원이 드는 거리를, 단돈 1,200원이면 시내 어디건 흡족히 다닐 수 있으니 그 누구도 살기 안 좋아졌다고 말하진 못 할 것이다.

보잘것없는 면 소재지 같지만, 있을 건, 있어야 할 건 그래도 다 있다. 우체국, 약방, 보건소, 내가 찾는 피시방도 하나 있고, 호프집, 노래방도 있다.

삼거리서 자전거를 내려 어디건 홍수처럼 늘어서 있는 차량을 헤치며 나아갔다. 도시나 농촌이나 사람 사는 집이 있는 도로는 죄다 자가용이 차지하고 있어 골치는 진짜 골치이다. 차에 사람이 떠밀려 다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떡 방앗간에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하얀 김에 뱃속이 허전한 걸 보니, 일 안 한다고 라면으로 점심을 때운 지도 한참이 지났나 보다. 바라만 보아도 정겨운 게 시골인심이다. 방앗간 주인이 잠시 멈추어 있는 나에게 잘 익은 시루떡 한 뭉치를 건넨다. 인사만 고맙게 하며 떡은 받지 않고 나는 길을 계속 갔다.

장사가 안되어선지 닫힌 지 오래 되었음 직한 통닭집이 있고, 그 옆에 통닭과 음식궁합이 아주 잘 맞는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호프집이 있다. 호프집 문을 조금 전 열었는지, 한창 청소 중인 여주인이 기웃거리는 나를 혹시나 마수 테이프를 끊을 첫 손님 아닌 가며 흘끔흘끔 쳐다본다. 그 모양이 전의 내 단골 술집 주모 천관녀와 흡사 닮았다.

좀처럼 그냥 지나기 힘든, 호프집은 내 진짜 방앗간이지만 여기는 객지이고 또 나는 혼자라 무시하고 지나갔다.

일찍 진 플라타너스 잎 두 장이 주인 없는 승용차 보닛에 얹혀있는 걸 보며 길을 건넜다. 목표한 피시 방 간판 앞에 서서 자리한 이 층을 올려다보자, 갑자기 목덜미 부분이 뻣뻣해 온다.

나무야!”

누군가 호프집에서 움츠린 내 등을 보며 나의 애칭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느낌뿐이란 것, 나는 잘 안다. 여기 온 지 두어 달이나 되어도, 정겹게 술 한잔 하자며 나를 부를만한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다.

나무야!”

하지만 이맘때면 내 바짓가랑일 휘어잡으며 발목에 딴죽을 거는 그 소리가 분명 거기서 들려왔다. 자전거의 세움대를 내리다 말고, 기어이 돌아보고 말았다.

덜커덕. 덜커덕.”

시커먼 빈 화물칸을 수없이 달고, 구부러진 동네 외곽 길을 기차만 무심히 달려가고 있다. “푸르르.”

빗물을 떨쳐버리는 옥수수 잎들의 수다스러움만이 불쏘시개처럼 날아와, 늘어선 가로등에 하나둘 불을 밝히 운다. 아무도, 아무도 없는 공허한 거리엔, 기다랗게 내리는 그림자들만 안쓰러운 내 어깨를 토닥여주고. 주체할 수 없도록 퉁퉁 불은 내 안의 그리움들을 빈칸에 옮겨 싣고, 소소소, 작은 키를 추스르며 슬피 우는 풀잎들을 뒤로 두고, 덜커덕, 덜커덕, 기차는 자꾸만 가고 있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