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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기찻길옆 2015. 6. 20. 21:21

지렁이

          정이식

        

 

 

 

배가 고팠다. 

 

술 한 잔 얻어 걸치러 따라간 대폿집에서

안주로 나온 삼겹살에 정신이 돌아갔다.

 

허겁지겁 구워먹다 불판에 팔이 데었다

 

뜨끔했지만,

얻어먹는 주제라 아무 소리 못 했다.

 

하지만,

덴 자국이 너무 아려서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나

화장실 형광등 붉은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이런?

팔뚝에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흉측스럽게 붙어 있다.

 

잠자리 들어서도 지렁이 이놈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후끈거리고 따끔거리고 밤이 깊어지며 더 도져서

잠은커녕 몸 뒤척이기가 바빴다 .

 

뭐해요? 잠 안자고.

피곤함에 지친 아내가 쓴 푸념을 늘어놓았다.

 

응,

지렁이 한 마리가 붙었나 봐.

지나는 말처럼 중얼거리며 나는 돌아누웠다.

 

 눈을 감아도 또 떠도

꼬물거리는 지렁이는 내 안에서 떠나질 않았다.

 

쑤시고 아린 짓을 퍼 대는

지렁이 한 마리 때문에 어둠의 귀신에게 쫓겨 다니다가

 

문득,

 지렁이 한 마리가 붙었나 봐.

 

이 말은 아내가 먼저 한 말이란 생각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

 

언제이던가?

지금처럼 실직하고 집안에서만 웅크리고 지내던 때,

아내는 내 몫까지 번다며 편한 일 그만두고 돈 더 주는 새 직장으로 몸을 옮겼었다.

 

그 며칠 후,

자정 다되어 퇴근한 아내의 몸에서는 역겨운 기름 냄새가 진동하였다.

 

놀고먹는 것만도 미안하여 잔소리 한번 못하고 억지로 돌아누운 그날

아내는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뭐해? 잠 안 자고.

지금의 아내처럼 그때에는 내가 그렇게 말을 하였다.

 

응?

지렁이 한 마리가 팔뚝에 붙었나 봐. 헤헤.

 

그날을 돌이켜 손을 꼽아보니 햇수로 10년.

잠든 아내의 긴 옷소매를 가만히 걷어 올렸다.

 

땡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아내는 긴소매 웃옷만 고집하였다.

긴소매 웃옷이 시중에 유행하는 패션이라며 나는 또 예사로 생각했었다.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고단함에 빠진 아내의 팔을 들고

창밖 경비 등불 희미함 아래 비추어 보았다.

 

아!

거기엔 내 팔뚝에 붙어 있는 지렁이보다

더 크고 흉측한 지렁이들이 꼬물꼬물 열을 지어 붙어 있었다 .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하고자 해도 할 일이 없어서

애꿎은 세상 탓하며 그래도 하늘 부끄러운 건 알아 방구석에만 숨어 지내던,

그때에 아내는 나도 모르게 팔뚝에 커다란 지렁이 여러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200 도를 오르내리는 기름을 끓여대어, 생선이야 채소야 그 속에 튀겨대는

열악한 작업장의 튀김기름이 튀어 온 살갗 짓무르다 못해 터지기까지 하여,

 

흉물스레 생긴 지렁이를 안 보이려 잠자리에서도 입은 아내의 긴소매였다.

바보같이 나는 고작 지렁이 한 마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데

수십 마리 지렁이를 십여 년간 키워온 아내는 그 많은 밤을 어찌 다 보냈을까?

울컥,

내지른 눈물 한 방울.

꼬물꼬물 기어드는 아내의 지렁이 위에 뚝, 하고 떨어진다.

 

그러며 나는 노란 달빛을 불러들여

아내의 팔뚝을 휘감고 있는 지렁이의 숫자를 다시금 세어본다.

 

열한 마리 열두 마리 열세 마리 열네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