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노래/바위고개 어릴 적 나는 글씨를 지독히도 못썼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써놓고도 내가 읽지 못할 때가 종종 있지요.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자 하나도 올바르게 쓰지 못하는 이런 나를 위해 밤마다 글씨 쓰기를 시키셨습니다 깜박거리는 호롱불 밑에서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시며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어머니의 노래 소리를 나는 받아써야 했으며. 때로는 가고파를 부르기도 하였지만 어머니는 늘 바위고개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수십 번씩 반복하며 쓰다보니 어린 나이에도 나는 바위고개를 3절까지 달달 외웠습니다. 동네 뒷산엔 읍내로 나가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그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오가며 돌을 던지는 늙은 당 나무가 있고 그 옆으로 양쪽으로 갈라진 커다란 바위가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바위를 할미바위라고 불렀지요. 어머니가 읍내에 볼일이라도 보러 나가시면 돌아올 시간을 갸름하여 나는 이 할미바위에 와서 놀았습니다. 봄이면 바위틈새로 뿌리를 내린 진달래들로 온 바위산이 빨갛게 물들었으며. 나는 할미바위 의 진달래꽃은 내 어머니의 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는 노래를 크게 부르시지 않으며. 사람들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노래를 안 했습니다. 늘 자그마한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겨울 추위에 웅크리며 자다 눈을 떠보면 어머니는 언제나 화롯불 쇠 젓가락을 휘저으며 바위고개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십여 년 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이 대목에 이르면 어머니의 얼굴은 흘러내린 눈물로 항시 젖어 있었습니다.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남부러운 것 없이 고이 자란 내 어머니는 아버지와 일본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동란이 끝난 수복지구의 광산에 아버지가 고급 근로자로 발령 받아 왔을 때만도 우리 집은 살기 좋았습니다. 내 별명은 가다 쟁이었습니다. 휴일 날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야외라도 나가면 높은 자리에 있던 아버지를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이 내게 친절로 다가왔었습니다. 이럴 때면 어머니는 "우리 가다 쟁이 가다 한번 제 보렴.." 하고 내게 주문을 하였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우쭐거리며 손을 양 허리로 갔다대며 폼을 잡았었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여서. 임시직 막장 근로자의 팔 절단 사고가 빌미가 되어 근로자의 앞에 섰던 아버지는 해고를 당하였으며, 그 참에 서울로 올라가 노동운동에 전념하였습니다. 귀부인에서 , 쌀 한 톨 없는 빈민층으로 하루아침에 추락한 가정을 보살펴야 하는 어머니의 손은 늘 거친 광야와도 같았습니다. 새벽이면 남의 집 물을 길러주는 것을 시작으로 모자라는 양식을 보태기 위하여 들로 산으로 풀뿌리부터 소나무껍질까지 어머니는 식량이 되는 것은 악착같이 긁어모으며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밤에만 우셨습니다. 헤어진 자식의 옷들을 바느질하시며 소리 죽여 바위고개를 부르며 우시었습니다. 자식들이 다 성장하고 마지막 막내가 결혼하던 날 어머니는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부르셨습니다."님은 가고 없어도 홀로 피었네." 세월이 흘렀어도 어머니는 박자 음정하나 틀리지 않고 내 어릴 적 듣던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바위고개를 부르셨고. 음치로만 알고 있던 친척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셨습니다. 그 뒤부터는 가족들 모임에서 노래방에 가면 어머니는 꼭 따라 오셨으며. 우리 가족은 어머니를 위해 1번 순서를 주었고 어머니는 변함없이 바위고개를 3절까지 다 부르셨습니다. 몇 년 전부터 병원신세를 지더니 숨이 가빠 다 못 부르겠다며 1절만 부르고는 마이크를 내게 주셨습니다. 바위고개 가사와 곡을 제일 잘 알고 있는 나는 2절과 3절을 어머니 못지 않게 열창을 하곤 하였습니다. 작년 장기 입원 중이던 어머니가 퇴원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어버이날이라 모처럼 아주 오랜만에 우리 4형제 가족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모였습니다. 한자리에 모인 자손들을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아픈 것도 잊고 외식하러 나가자고 강력히 주문하였습니다. 불편한 몸이라 걱정도 되었지만 큰조카가 업고 차에 올라 가까운 고깃집으로 갔습니다. 집에서 가져온 특수 의자에 앉은 어머니는 당신의 손 주들 입에 들어가는 고깃점을 보며 입가에 흐믓한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돌아오는 길, 어머니의 권유로 우리는 노래방으로 갔습니다. 언제나 처 럼 바위고개를 찾아서 어머니께 드렸더니."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어머니는 한 소절도 못 부르고 심한 기침을 해대더니 마이크를 내게 내밀었습니다. "옛 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나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정성껏 바위고개를 불렀습니다. 눈을 감은 채 감상을 하고있던 어머니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3절은 가족모두 합창을 하였지요."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이제 어머니는 바위고개를 부르실 수 없습니다. 치료 불가능한 병마와 싸우느라 늘 자리에 누워 계셔야 하고 숨이 차서 호흡도 곤란하여 노래를 부르실 수 없습니다. 시골을 떠나 부산으로 이주하여 제칫국 동이를 이고 온천장의 새벽을 열며"제칫국 사이소"를 외치던 억척스런 어머니의 모습은 이제 찾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노래 바위고개는 우리 집안의 노래가 되었고 내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어버이날에는 어머니 머리맡에서 이 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 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