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지우펀의 영혼

기찻길옆 2016. 6. 21. 05:06

외국에 나가면 내겐 그리운 나무가 있다.

평소 가로수에 관심이 많아서 다른 나라에선 어떤 나무가 가로수 역할을 할까?

궁금해오던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가보면 아는 나무는 하나도 없고 그 나무가 그 나무 같고

 제대로 된 나무의 기억은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돌아오곤 한다.

 

 이번엔 아니리라 다짐하며 인터넷을 통하여 정보를 챙겨서 떠난 대만 여행이었다.

 용수라는 이름의 가로수를 미리 알고 갔지만,

늙은 나무의 허리에 달라붙은 뿌리들은 내 감정을 건드리지 못했다.

 

시무룩하던 차에 온천으로 유명한 우라이 마을에서 질경이를 만나며 내 기운은 되살아났다.

 

우라이 마을. 강가에 온천이 솟아 마을민들은 노천을 즐긴다.

 

 

 

우라이의 야시장.

대만의 관광지엔 비슷한 야시장이 어디에나 있다.

 

 중정기념관 앞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이나 달려서 도착한 우라이 마을 에서였다.

정비 되지 않은 갓길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히 들어찬 이 질경이들.

왜 이리 가슴을 당기는지.

 

 버스정류장 근처 도보에 깔린 질경이들.

 

숨이 벅찰 정도로 반가우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 찡함이 울려졌다.

돌아가신 누님생각이 몰려와서다.

 

그리운 사람은 관련 있는 식물이나 물건을 대하면 새록새록 그 추억이 되살아난다.

 돌이켜보니 벌써 11년이 흘렀다. 누님 떠나가신 지가.

 

누님이 나보다 열한 살 더 많으니 누님 돌아가실 때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이다.

 슬픈 기억은 여행의 재미를 가로막는다.

억지로 누님의 생각을 접고 열심히 주변 스케치에 열을 올렸는데

엉뚱한 곳에서 누님의 환상은 다시 일어났다.

 

지우펀은 우리말로 구분이라 불리는 광산지역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만을 강탈하여 여기서 금광을 채취하였다고 한다.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절을 뒤로 지우펀으로 들어서다 멀리

산 밑에 아기자기 모여 있는 수없이 많은 작은 집들을 발견하였다.

 

 

산 등성이까지 집들이 덮고 있었다.

 

대만은 대체로 시골도 도시형주택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주거문화는 발전된 편이었다.

전날 대만의 그랜드캐넌으로 불리는 화련을 가려고 부러 저급기차를 탔었다.

 

3시간 반을 기차로 가면서 본 농촌의 집들은 모두가 도시형이었다.

논 가운데의 집들도 모두 양옥으로 지어 있어서 도대체 농기구는 어디에 둘까?

혼자 고민하기도 하였다.

 

 산 밑에 게딱지처럼 붙어 있는 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밭도 논도 또한 공장도 없는 곳에 밀집 형으로 들어선 집들엔 누가 살까?

궁금증을 가득안고 지우펀에 들어섰다.

 

 

당시의 채굴 기계.

 

지우펀의 유명한 광부 밥을 사 먹다가

한국 관광객을 안내하던 가이드를 만나 게딱지같은 집들로 가득 찬 산 아래 마을을 물어보았다.

어이없게도 그건, 산사람의 집이 아닌 죽은 자의 무덤이란다.

 

 

 

  대만의 영혼이 사는 곳.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대만을 전리품으로 획득하며 금광채굴에 온 힘을 모았다.

필요한 광부는 전쟁포로로 대처하였다.

굶주림과 혹독한 노동으로 죽어나간 광부들을 근처의 산에 묻었다.

 

세월이 흘러 이 산이 명당자리로 알려지며 너도나도 묘지를 쓰게 되었다.

1기의 묘지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기천만원 정도라 한다.

죽어서도 살았을 때와 같은 대우를 대만사람들은 해주기 때문이다.

 

작게는 8평에서부터 크게는 800평짜리 묘도 있다고 한다.

어떤 유명 연예인의 묘지는 수억 원이 넘는 돈으로 치장되었다니

살아 백년보단 죽어 수억 년을 기리는 마음이 모두에게 가득한가보다.

 

그래서 대만 사람들은 죽은 후의 유택을 위해 살았을 때에 힘들여 돈을 모은다고 한다.

 유택이 거창할수록 효도의 질을 높이 평가받는 사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상신을 섬기는 풍습은 베트남과 같아선지 무덤의 형태도 베트남과 닮았다.

 지우펀의 또 다른 관광지인 홍등가를 돌아 나오는 길에선 산자와 죽은 자가 뒤섞인 마을을 만났다.

 

 

 

 

 

로마의 휴일, 포스터가 걸린 홍등가

오드리햅번이 이곳에서 촬영을 하였다고하나

확실치 않다..

 

 

무덤가운데에 집들이 있고 거리낌 없이 사람들은 무덤사이를 통하여 오고가고 있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만인의 삶도 그리 좋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경제는 쪼들리고 실업자는 넘쳐나고.

젊은이가 집 한 채 장만하기는 우리보다 더 어렵다는데

 

죽은 자를 위해선 필요 없는 돈을 저리 펑펑 써도 괜찮은 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삶은 아주 잠깐이다.

 

지구 역사의 46억년 중에 지금과 같은 생각하는 인간의 탄생은 2만년도 채 안된다고 한다.

이런 연유를 알기에 영원히 살아갈 집을 지으려 대만 사람들은 기를 쓰며 유택에 돈을 들이나 보다.

 

 무섭다기보다는 살갑게 다가오는 저 무덤에 왜 이리 신경이 쓰일까?

누님이 내 마음의 근처에서 어른거리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의 납골당에서 한줌의 재로 영면에 들고 있는 누님의 생각이

홍등가를 돌아서 숙소인 타이베이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숙소. 타이베이 인근의 식당.

저녁시간엔 언제나 식당 앞이 붐빈다.

 

 

대만은.

군대 간 아들이 휴가를 나와도

돈을 주면서 밖에서 사 먹으라고 할 만치.

외식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여기서 저녁을 먹으며 남들이 많이 시키는 음식을 주문했는데

얼마 먹지 못하고 돌아섰다.

취두부로 조리한 음식인줄 몰라서였다.

출처 : 4050 아름다운 추억(부산.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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