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사과는 홍옥이 맛있다

기찻길옆 2017. 10. 14. 09:22

거창의 가을은 붉은 사과 빛에 묻혀있다. 저녁놀조차도 사과를 닮았다. 거창 입구에서부터 가판대에 사과가 널려있고 시내로 들어갈수록 사과천지다. 붉고 윤이 반짝이는 저 사과는 홍옥이다. 사과해야 홍옥하고 부사밖엔 모르지만 홍옥은 보기만 해도 목젖으로 침이 넘어간다.

 

사과는 원산지가 대구다. 조선 말기 외국의 선교사에 의해 대구에 처음으로 사과가 심어졌다. 하지만 관리 소홀로 다 죽고 동촌의 모래밭에 심은 사과나무 한그루만 살았다. 이 사과의 씨앗으로 전국에 사과가 퍼졌다. 이름도 모래밭에서 난 과일이라 해서 사과의 사자는 한문의 모래사자에서 따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보다 거창이 사과론 더 알려져 있다.

 

홍옥은 부사보다 일찍 수확을 하니 지금이 제철이다. 거창사과, 홍옥. 사과를 바라보니 저 멀리 가슴깊이 숨어있던 36년 전 애잔한 추억하나가 꿈틀거리며 살아난다. 36. 햇수를 잊지 않는 이유가 내겐 또 있다.

 

말 그대로 수저 두개와 솥단지 하나만 들고 시작한 결혼생활이었다. 이층 올라가는 계단 밑에 허술하게 지어진 진주의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 세 얻어 살 때였다. 쥐꼬리만 한 봉급도 반으로 잘라 적금을 붓던 시절이었으니 궁핍하기는 말이 아니었다.

 

그날은 가조저수지공사장에 1톤 차를 몰고 직장 일보러 가던 길이었다. 지금처럼 거창은 홍옥으로 뒤덮여 있었다. 저녁 해거름이어선지 배도 고팠지만 사과를 보자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사과가 먹고 싶네.”

며칠 전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아내는 사과타령을 했었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뻔히 알면서도 주머니를 뒤적였다.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씁쓰레 고픈 웃음을 지으며 나는 가조로 차를 돌렸다.

 

가조에서의 일이 늦어져 진주로 다시 출발할 때엔 밤이 한창이었다. 가조에서 거창으로 나가려면 기다란 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때의 길은 말 그대로 신작로여서 온통 자갈밭이었다. 차도 낡아 달릴 수 없어서 천천히 고개를 올라가는데 고개 중간쯤에 양복 입은 신사가 전조등 불빛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태워주라는 표시였다.

 

가까이 가며 보니 남자는 술이 억수로 취해서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못 본 척 그냥 지나쳤다. 술 취한 사람 태워서 이득 될 것 없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며 후사경으로 보니 남자는 차가 멀어지는데도 손짓을 자꾸 했다. 행색을 보니 그럴듯한데 택시를 타지 왜 고개를 걸어갈까? 마을은 고개 첫머리에 있고 다음 마을은 고개가 끝나야 있다. 처음부터 걷지는 않았을 터인데 무슨 사연이 있을까? 저 속도로는 거창까지는 날이 밝아도 못 간다. 가물에 콩 나듯 차는 다니겠지만 저리 취하면 나뿐 아니라 누구도 안 태워 준다.

 

한참을 생각하다 나는 차를 세웠다. 남자를 태워 주리라 결심하고 후진을 하였다. 남자는 반색을 하며 차에 올랐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남자가 올라타자 술도가에 든 것처럼 술내가 진동을 했다.

 

택시를 타시던가 하시지 많이 취하셨는데 어떻게 고개를 넘어 가시려고요?”

연방 고맙다며 머리를 주억거리던 남자가 말문을 열었다.

 

내가요. 거창농협에 근무하는데요. 저 아래 마을이 내 처갓집 아닝교.”

남자는 술기운에 혀가 꼬부라져 의사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남자는 농협의 일보러 나왔다가 처가 마을에서 처남을 만났다. 늦도록 술타령을 하다가 막차를 놓쳤다. 택시를 불러 탈수도 있었지만 마침 오토바이로 거창 가는 마을청년이 태워 준다기에 냉큼 뒷자리에 올라탔다. 남자는 달리는 오토바이 뒤에서 술주정을 하였다.

 

 ‘너 몇 살이냐? 내 막내처남하고 비슷하네. 그런데 좀 살살 가라. 다치면 네가 책임 질 거냐.’ 등등. 청년은 화가 잔뜩 나서 고개중간에서 오토바이를 세우고 위험해서 못 태우고 가겠다며 내리라 하였다.

 

남자는 자존심은 또 있어서 청년에게 욕을 냅다 퍼붓고는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내리고보니 후회가 막심했다. 밤은 깊었고 집도 절도 없는 곳에서 간간이 차는 지나가도 휘청거리는 남자를 태워 줄 리가 만무했다. 걱정이 태산만큼 쌓여 갈 때에 내가 구세주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 집이 거창인데요. 기사님 내가 이 고마움을 어찌 갚을꼬. 길옆이 우리 집입니더. 거창은 사과의 고장 아닌교. 내 사과 한보따리 작지만 성의로 드리겠십니더.”

 

남자가 말 안 해도 집까지 태워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사과 말이 나오자 이상하게 내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임신한 아내가 생각나서였다. 남자는 집에 도착하자 자는 아내를 깨워서 내게 인사를 시키고 사과를 나무상자에 수북이 담아 흐르지 않도록 신문지로 덮고 끈으로 묶어서 차에 얹어주었다.

 

진주의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훨씬 넘었다. 아내는 안자고 있었다. 사과를 들고 오는 나를 보자 아내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사과를 얻게 된 동기를 듣고는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잖아도 사과 먹고 싶던데. 참 예쁘다. 뽀송뽀송하니.”

아내는 뽀송뽀송한 사과를 아까워서 베어 먹지 못하고 요리 굴리고 조리 굴리며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행복해 하였다.

 

그 이듬해 딸이 태어났다. 나는 피부가 뽀송뽀송한 사과를 닮았다고 딸 이름을 보송이라 지었다. 정보송. 그 딸애가 올해 36세다. 내가 그때의 햇수를 잊어버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름내 비오고 변덕스러운 날씨였음에도 거창사과는 풍년인가보다. 가격 적은 팻말을 보니 그리 비싸지도 않다. 나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사과 진열대로 갔다.

 

작년에 결혼한 딸애 보송이는 그때의 제 엄마처럼 지금 임신 중이다. 어쩌면 보송이도 제 엄마처럼 사과가 먹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는 튼튼하고 잘 생기고 뽀송뽀송한 홍옥 한 상자를 서슴없이 샀다. 문득. 하늘을 보았다. 거창의 온 하늘이 사과처럼 아름답고 붉은 노을로 물들여지고 있었다.

출처 : 4050 아름다운 추억(부산.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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